‘자연의 즐거움’ ― 영원히 펼쳐지는 자연의 변주
자연에는 끝없는 변주들이 펼쳐진다. 자연을 그린 대 화가들은 일관되고 철저하게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미묘한 자연의 변주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나치는 것을 실제로 목격한 자들이며, 캔버스에 그 감동을 그대로 증명해낸 자들이다.
“자연이 본래의 모습으로 서 있을 때, 마치 나무 덤불 위로 샴페인을 뿌려놓은 듯 보여. 마치 사방에 샴페인 거품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실로 엄청난 광경이야. 이런 장면이 연출되는 건 고작 이틀 정도뿐이야.” ― 데이비드 호크니
자칫 길을 잃어버릴 수 있는 우거진 숲. 그 속에서 놀라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풀잎과 나뭇잎 하나하나. 김재현은 자연 속에서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는 경이로운 장면들을 목격했다.그는 자연에서 받은 순간의 감흥을 그대로 살려내기 위해 즉시 사진을 찍어 장면을 포착한 후 자신의 스튜디오로 돌아와 그때의 심적 인상을 캔버스에 되살린다.
현재 김재현이 진행 중인 작업은 숲에서 받은 자연의 인상을 캔버스에 재현하는 <자연-인상>과 그 뒤에 이어진 <숲-인상> 연작으로 구분된다. <자연-인상>은 숲의 안으로 들어가는, <숲-인상>은 자연의 외부에서 바라보는 느낌을 표현한다. 이 연작들은 작가만의 시각적 경험에서 본 자연을 그려낸 그림이며, 시각화하기 어려운 인상적인 느낌을 표출하기 위해 추상화된 표현방식이 동반된다.
김재현은 수고로움을 감내하면서 작은 붓을 사용하여 캔버스 위에 풀잎 하나하나 나뭇잎 하나하나를 붓으로 쌓아간다. <숲-인상> 연작은 블랙홀처럼 무한히 깊고 검은 장에서 시작하여, 그 위에 작은 붓으로 터치를 더하고 이를 중첩시킴으로써 완성된다. <숲―인상>을 대면하면 유기적인 덩어리로 캔버스가 꿈틀거린다. 한 터치 한 터치 인내를 통해 자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김재현의 작업과정은, 자신의 작업을 온전히 자연에게 돌려주기 위함이다. 그는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서서히 새로운 이미지로 발전시킨다. 결과를 예측하지 않은 채.
이처럼, 김재현의 작업은 자연에서 온다. 자연은 늘 변화하고 새로우며 느낄 것도 그릴 것도 많은 무한한 탐구의 공간이다. 김재현의 자연은 자신을 압도하지 않는다. 그에게 자연은 마치 자신 앞에 펼쳐진 드넓고 안락한 커튼처럼, 자신의 앞에 모습 그대로 서 있는 편안한 존재이자 치유의 장이다.
풍경(landscape) 지우기
김재현의 풍경화에 대한 오랜 고민과 내면의 갈증은 지금의 작업방식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살아있는 자연을 소재로 하는 그림(풍경화)이 고루하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전 작업방식은 많은 풍경화가들이 추구했으나 김재현은 그 방식으로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자연은 어느 순간 풍경이 되고 의미화 된 것이다.
김재현은 기존의 코드화된 풍경, 인간 인식의 결과로서의 풍경,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풍경, 그리고 풍경에 덧씌워진 인간의 일방적인 시선을 벗겨낸다. 배경으로서의 풍경도 지워버리고 이것을 자연으로 되돌려 놓는다.
김재현은 자연이 연출하는 감동을 재현하기 위해 자신이 익혀온 표현법(아카데미즘), 예를 들면 정통구상에서의 원근법이나 투시기법, 상투적 구도 등을 최대한 자제하거나 의도적으로 깬다. 그리고 다양한 시도와 자유로운 실험을 한다.
규칙을 떠나 셀 수 없을 만큼 중첩되는 붓질과 터치를 통해 작가 자신이 느낀 자연의 인상은 캔버스에 드러난다. 여기에서 재현은 자연 속에 있는 자, 자연 속에 들어온 자에게만 은밀하게 스쳐간 온도, 향기, 바람, 느낌, 인상의 재현이다. 작가 내면의 자연에서 받은 특별한 인상을 강조하는 그의 작품은 새로운 자연의 이미지를 창출한다. 의식적 터치와 무의식적 터치가 쌓이면서 교차되는 어느 지점, 캔버스 안의 구성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는 어느 지점에서 김재현은 붓을 멈춘다.
김재현은 자연을 보는 방식에 있어 인상파 화가들을 존경하지만, 색의 사용에 있어서 그들의 보색대비를 따르지는 않는다. 또한, (색보다는) 톤을 통해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을 중시하며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자신의 눈으로 보아 거슬리는 것을 없애면서 그려나간다. 빛의 사용에 있어서도 명암대비를 강하게 주기보다는, 한 점 한 점 터치해가면서 빛을 얻어가는 방식을 취한다. 어느 하나에 포인트를 주는 것이 아닌 편안하고 고르게 빛을 나누어 가는 방식이다. 이것으로 마치 부서진 햇살 조각들이 나뭇잎에 얹혀 있는 것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 작가가 자주 취하는 그림의 장소는 아카시아 숲이다. 그림의 소재나 장소를 특별히 제한하지 않지만, 콘트라스트가 뚜렷한 빛을 바로 받는 장소 보다는 빛을 받지 않는 음지와 같은 곳이 김재현의 작업에서 추구하는 방향과 맞다. 이처럼 김재현의 작업방식은 주제를 살려 강조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다시, 풍경(landscape)에서 자연(nature)으로
자연을 보는 것은 특정한 관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자연은 화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며 새롭게 해석되어 왔다. 그 바탕에는 영원한 수수께끼로서의 자연을 향한 화가만의 느낌과, 이를 대하는 화가만의 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 컨스터블, 윌리엄 터너, 코로, 피사로, 세잔, 반 고흐의 자연이 그러했듯이, 김재현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연이 존재하는 모습(화가가 바라보는 주관적 자연)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기를 바란다. 김재현은 자연에서 느낀 인상과 감정을 전달하되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이루는 빛과 대기의 움직임, 날씨와 같은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경이로운 현상을 표현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는 자연의 인상을 그대로 담아내기 하기 위해 김재현은 거대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김재현은 스스로를 예술가라 정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술작품과 연동하는 화가라는 주체가 붓과 캔버스를 통해 자신이 가야하는 길, 즉 작업의 여정 자체에 가치를 둠을 의미한다. 여행객으로서의 데이비드 호크니가 되든 수도승으로서의 루시안 프로이드가 되든 진지하게 화가로서의 길을 가는 자들의 태도를 존중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늘 가능성을 열어두는, 철저하고 일관된 삶의 과정을 걷는 진정한 화가. 화가로서 필연적이라 할 수 있는 끊임없는 노력과 실천의 이 모든 과정들은 화가로써 주어진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글 김수영 (미술사학, 문화예술경영 전공)